시대정신의 변화: ‘탈물질주의’란 무엇인가?
탈물질주의(post-materialism)는 1970년대 인류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념화된 사회적 가치관 전환 현상입니다. 그는 ‘조용한 혁명(The Silent Revolution)’이라는 저서에서, 경제적 안정과 물질적 충족 이후, 개인들은 생존이 아닌 자아실현, 환경 보호, 성평등, 표현의 자유 같은 비물질적 가치를 더욱 중시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은 선진국일수록, 또 젊은 세대일수록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정치 성향, 정책 요구, 유권자 행동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컨대, 기후변화 대응, 다문화 수용, 소수자 권리 증진 등이 탈물질주의적 의제를 대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이 한국 정치 지형에서도 자연스럽게 안착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를 거쳐온 배경과 더불어 아직도 강한 물질주의적 동기가 유권자 정서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탈물질주의 유권자 성향이 부딪히는 현실적 한계는 무엇일까요?
경제 불안정성과 세대 간 가치 충돌
탈물질주의의 전제 조건 중 하나는 ‘기본적인 물질적 안정’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청년 실업률, 주거 불안, 불평등 문제를 겪고 있으며,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경제적 위기감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지금 당장의 생존"이 우선되는 경향이 강하며, 자아실현이나 생태주의 같은 의제는 이론적 동의는 가능해도 행동으로의 전환은 미미한 편입니다.
또한, 세대 간 가치관의 괴리도 한계로 작용합니다. 베이비부머 세대나 X세대는 산업화와 국가주의, 가족주의 등의 가치에 익숙하며, 탈물질주의에 대한 수용력이 낮습니다. 반면 MZ세대는 정체성과 다양성,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지만, 정치적으로 이 가치들을 지지할 플랫폼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제도 정치권의 수용력 부족
한국 정당 정치의 핵심 동력은 여전히 ‘경제 성장’, ‘복지’, ‘안보’ 같은 전통적 이슈에 집중돼 있으며, 탈물질주의적 의제를 전면적으로 제시하는 정당은 매우 드뭅니다. 정의당 등 일부 진보 정당이 환경, 젠더, 반성장주의적 정책들을 시도했으나, 대중적 지지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유권자들이 아직도 ‘실용적 접근’을 중시한다는 방증이며, 특히 ‘현실 정치’에서는 소수자 권리나 탈탄소 같은 주제가 자칫 ‘현실감 없는 주장’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이는 탈물질주의의 정책적 구현이 ‘공감의 언어’를 확보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디지털 감성정치와의 상충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디지털화와 SNS 사용률을 보이는 나라입니다. 이로 인해 정치적 감정이 실시간으로 증폭되고, 이슈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합니다. 문제는 탈물질주의적 가치는 장기적인 안목을 요구하며, 즉각적인 효용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기후위기 대응, 성소수자 권익 보호 같은 이슈는 본질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환경은 단기적이고 감정적인 이슈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 긴 호흡의 탈물질주의 아젠다가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정치 냉소주의와 시민 참여의 딜레마
탈물질주의는 전통적으로 ‘시민 참여 확대’, ‘숙의 민주주의’, ‘보텀업 정치’ 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위계적이고, 정당과 정치인 중심의 탑다운(top-down) 의사결정 구조가 주류입니다. 이는 시민사회의 역할을 약화시키며, 유권자 스스로의 정치적 무력감을 강화시킵니다.
특히 청년층은 선거를 통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보다는, ‘정치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냉소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탈물질주의 가치를 견인할 주체가 성장하기 힘든 토양임을 의미합니다.
문화적 유교주의와 탈물질주의의 충돌
한국의 문화적 DNA에는 여전히 유교적 전통이 깊숙이 스며있습니다. 가부장제, 권위주의, 연고주의는 탈물질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의 권리’, ‘평등’, ‘자율성’과 상충합니다. 이는 단지 제도적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반의 정서와 규범의 문제로 귀결되며, 유권자들이 비물질적 가치를 공적 영역에서 지지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예컨대, ‘퀴어 퍼레이드’, ‘페미니즘’, ‘다문화’ 같은 이슈는 여전히 많은 유권자들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탈물질주의적 성향이 사회적 지지를 받는 데 있어 결정적인 제약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한국적 탈물질주의는 가능한가?
한국 사회에서 탈물질주의적 유권자 성향은 존재하되, 여전히 ‘주변적’이며 ‘제한적’입니다. 그 배경에는 경제적 불안정, 제도 정치의 경직성, 세대 간 가치 충돌, 감성 중심의 미디어 환경, 그리고 유교적 문화 구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젠더 갈등, 기후 행동, 청년 정치운동 등은 새로운 탈물질주의 흐름의 맹아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보다 넓은 공론장과 제도적 지지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국에서 탈물질주의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경제적 안정성과 사회적 안전망 강화, 다른 하나는 문화적 공감과 서사의 확장입니다. 생존을 넘은 공존, 경쟁을 넘은 공감의 정치가 가능해지는 순간, 비로소 탈물질주의 유권자 성향은 제도 정치의 한 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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