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정치화, 갈등의 구조화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과거 계급, 이념 중심의 정치 대립을 넘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중심 의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종교, 지역, 계층, 세대 등 집단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정치 참여와 요구의 증가는 정치적 다양성을 확대하는 한편, 사회 내 분열과 갈등을 구조화시키는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 ‘세대’라는 정체성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정된 계급이나 출신보다도 훨씬 유연하고 포괄적인 갈등의 축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기회, 사회적 기대, 기술적 환경이 판이하게 다른 세대 간에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선 구조적 인식 차이가 존재하며, 이로 인한 정치적 분열이 점차 고착화되는 조짐도 보이고 있습니다.
정체성 정치의 부상: 구조적 배경과 특징
정체성 정치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특성과 경험’을 중심으로 정치적 요구를 조직하고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배경에서 확산되었습니다.
1. 신자유주의 이후의 개인화 시대
- 전통적 계급·노동연대가 약화되며, 개인의 삶의 경험과 정체성이 정치의 주제가 됨
- 사회가 획일적인 규범보다 다원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동
2.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변화
- 소셜미디어를 통한 커뮤니티 형성과 동원 가능성이 높아짐
- 개별 정체성 기반의 여론 형성과 확산이 빠르고, 감정적으로 결집됨
3. 정치 주체의 다변화
- 과거 정치에서 주변부였던 여성, 청년, 소수자, 비수도권 주민 등의 정치 참여 확대
-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의제가 **정책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상징정치(symbolic politics)**에 머무는 경우도 많음
이러한 정체성 정치의 확산은 기존 정치질서에 균열을 내는 동시에, 사회 내부의 다양한 분열선을 드러내며 세대 갈등을 하나의 핵심축으로 고착화시켜가고 있습니다.
세대 간 분열: 왜 ‘세대’가 핵심 갈등 구조가 되었나?
세대란 단순히 출생 연도가 아니라, 공유된 역사적 경험과 환경, 가치관에 의해 구성된 정치적 단위입니다. 오늘날 세대 간 갈등이 정치적 주요 이슈가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존재합니다.
1. 경제적 기회의 비대칭
- 부동산, 일자리, 연금 등 자산과 기회 배분에서 명백한 불균형
- 고령세대는 자산을 축적한 반면, 청년세대는 고용 불안정과 가격 급등으로 경제적 박탈감을 느낌
- 예: ‘헬조선’ 담론, ‘MZ세대의 반복지주의’ 대두
2. 사회적 가치관의 충돌
- 성별, 가족, 젠더, 환경, 이민 등에서 전통적 가치관과 진보적 가치관이 세대별로 극명하게 나뉨
- ‘꼰대’와 ‘요즘 애들’이라는 문화적 갈등 구도가 정치적 혐오로 확장
3. 기술 환경의 차이
-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MZ세대)는 소셜미디어 중심의 정치 문화 형성
- 반면 기성세대는 전통 미디어, 정당 중심 정치에 익숙함
- 정치소통 방식에서의 단절이 인식 차이를 더욱 심화시킴
결과적으로, 세대는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집단 간 세계관의 충돌이며, 이것이 장기적인 정치 갈등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정체성 정치와 세대 갈등의 상호작용
정체성 정치는 본질적으로 상대적 박탈감과 소속감에 기반하며, 세대 간 갈등을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1. 정당의 전략적 세대동원
- 청년 공약, 노인복지정책 등 세대별 맞춤 공약이 늘어남
- 그러나 이는 갈등 조정을 위한 노력이 아닌 표심 획득 수단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음
- 세대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면서도 세대 간 중재를 위한 종합적 사회계약은 부재
2. 혐오 정치의 구조화
- 특정 세대를 겨냥한 비난: ‘벼락거지’ ‘달동네 금수저’ ‘요즘 것들’ 등의 프레임화와 혐오 언어의 일상화
- 미디어와 정치인들이 이 분열을 자극하거나 방조하면서, 세대 간 신뢰 기반이 붕괴됨
3. 정체성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 약화
- 세대, 성별, 계층, 지역 등의 정체성이 서로 교차하며 형성되는 현실을 외면
- ‘MZ 남성’ ‘꼰대 여성’ 등 이분법적 정치담론의 위험성이 높아짐
세대 분열의 장기화 가능성과 구조적 고착 위험
정체성 정치와 세대 갈등이 맞물리면, 단기적 대립이 아닌 장기적 구조로 고착될 위험성이 커집니다.
1. 정책 설계의 왜곡
- 특정 세대의 이해에 편중된 정책 설계가 반복되면, 다음 세대는 국가에 대한 신뢰를 상실
- 사회보장제도나 조세 정책 등에서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세대 간 이기주의가 강화될 수 있음
2. 정치 불신과 탈정치화
- 청년층의 정치적 냉소주의: “기성세대만을 위한 정치”라는 인식 강화
- 노년층의 보수화 및 고립감 심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반동적 정치 태도로 전환
3. 협치의 기반 붕괴
-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고 조율하는 과정 없이, 사회적 합의가 실종
- 결국 민주주의 자체의 통합력과 제도적 조정 능력이 약화
이러한 상황은 갈등의 반복이 아니라 분열의 고착화, 즉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체성 정치가 본래 추구했던 다양성과 포용의 정치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대응 방안: 세대 간 대화와 구조적 조정의 필요성
정체성 정치의 장점은 기존의 소외된 집단에게 목소리를 주었다는 점에 있으나, 그것이 갈등 구조를 고착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응이 필요합니다.
1. 세대 간 협의 거버넌스의 제도화
- 사회보장제도, 부동산, 교육 등 주요 의제에 대해 세대별 대표성을 반영한 협의체 구성
- ‘청년의회’, ‘고령사회위원회’ 등과 같은 실질적 참여 장치 마련
2. 교차 정체성 기반 정책 접근
- 단일 정체성이 아닌, 세대-계층-지역 간 교차 관점에서 문제를 설계
- 예: 청년이면서 지방 거주자이자 저소득층인 집단에 맞는 맞춤형 정책
3.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재설계
- 세대 간 사용하는 미디어와 언어, 의제를 매개로 다리 역할을 하는 정치·미디어 플랫폼 필요
-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공론장 활성화
4. 세대 간 공동체 회복 교육
- 공교육 및 지역 커뮤니티 중심으로 세대 이해 프로그램 및 공동 프로젝트 장려
- ‘세대통합형 공공주택’, ‘세대혼합형 자원봉사’와 같은 실천적 공간 마련
다양성의 정치에서 ‘공존의 정치’로
정체성 정치와 세대 간 갈등은 현대 사회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 복잡한 정치현상입니다. 그러나 이 정치적 다양성이 공존과 연대의 정치로 전환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열의 민주주의 속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세대 갈등은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치와 경험, 기회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이며, 지속적인 협의와 재조정 없이는 장기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정체성의 차이를 동원 수단이 아니라 공적 대화의 자원으로 전환하는 성숙한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정치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물질주의 유권자 성향의 한국적 한계 (2) | 2025.06.02 |
---|---|
정치적 담론 분석을 통한 후보자 슬로건 유형 분류 (1) | 2025.05.29 |
연성 권위주의 체제에서 언론 자유의 변증법적 진화 (1) | 2025.05.26 |
신제도주의(New Institutionalism) 시각에서 본 지역 정당의 존속 조건 (0) | 2025.05.25 |